3. 십자군 원정
회교도인 터키인들이 성도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교황 우르반2세는 서유럽 기사들에게 성지 해방을 호소하고 군사를 일으킬 것을 요청하엿다. 클뤼니의 개혁 덕분에 성지 해방을 호소하고 군사를 일으킬 것을 요청하였다. 클뤼니의 개혁 덕분에 대다수 유럽인이 성전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군주와 기사들이 성지 회복의 대열에 동참했다.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 도시를 영속적으로 지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1270년까지 계속해서 십자군 원정이 계획, 실현되었으며, 그러는 가운데 교황권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종교적인 원인에 기인했던 십자군 원정은 점차로 물질적 이해관계를 띠게 되었다. 특히 제4차 십자군 원정은 콘스탄티노플을 동방무역에서 배제하려는 베네치아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경제 전쟁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4. 슈타우펜 왕조와 황제권의 실추
1137년부터 시작된 슈타우펜 왕조는 1152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 이르러 다시금 강력한 독일제국을 이루었다. 롬바르디아의 강력한 도시들조차도 그의 지배권을 인정해야 했고, 여기에 도시국가 밀라노가 반기를 들었지만 함락당한다. 교황이 황제에 반대해서 도시국가들의 편에 서게 되자 다시 불붙은 교황과 황제의 싸움이 20년 가까이 지속된다. 하지만 레냐노 전투에서 패하자 그는 교황과 교황을 지지하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이 무렵 작센과 바이에른의 대공으로서 벨펜 왕가 출신인 사자왕 하인리히는 동방 식민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메클렌부르크와 포메른 등 뤼벡 동쪽의 광활한 지역들에 독일인들이 정착하게 된다. 롬바르디아의 도시국가들을 치려는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을 사자왕 하인리히가 거절하자 황제는 그를 파직하고 봉토들도 회수한다. 영방국가적 개별 이익추구 정치를 관철하려는 황제의 정치적 조치가 다시 한 번 관철된 것이다.
1190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십자군 원정에서 죽고 나자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가 콘스탄체 여왕과의 혼인을 통해 시칠리아를 상속받아, 슈타우펜 제국이 잠시나마 최대로 확장된 영토를 갖게 되지만, 하인리히 6세가 일찍 죽자 모든 것이 다시 수포로 돌아간다.
비슷한 시기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교권과 세속 권력을 막론하고 중세의 가장 강력한 교황으로 모든 기독교 종파가 그를 수장으로 인정했다. 그는 슈타우펜 가와 벨펜 가 사이에 벌어진 독일의 정치적 분쟁에 교묘하게 개입합으로써 독일 왕들이 이탈리아에서 황제권을 행사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또한, 그의 권유로 독일의 군주들은 슈타우펜 가의 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 왕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제국의 정치보다는 이탈리아를 위한 독일 군주들의 협조를 요청한다. 이를 위해 광산 개발권, 관세 징수권, 화폐 제조권 등 제국의 황제로서 지니고 있던 경제적 특권들을 거의 모두 영방군주들에게 넘겨준다. 그리하여 독일의 영방군주들은 왕으로부터 독립적인 영주들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라는 근대적 행정국가를 다스리면서 롬바르디아의 도시국가들에 대한 권리 주장으로 교황과는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을 빚었다. 하지만 후에 그의 왕위 계승자들은 결국 시칠리아마저 잃고 말았다. 그 이후 독일에서는 영방군주들이 의도적으로 힘없는 왕들만을 선출하여, 왕권과 황제권을 무력화시키고자 하였다. 슈타우펜 왕가의 몰락으로부터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가 들어서는 1273년까지 약 20년간의 황제권 공백기를 독일사에서는 '대공위 기간'이라 부른다. 이 시기 이후에도 독일의 영방국 군주들은 1871년 프로이센 제국이 들어설 때까지 관행적으로 왕권에 버금가는 독립적 권한을 누리게 된다.
5. 기사계급의 문학
카를 왕조 시대에는 게르만 지역에 기독교가 전래, 정착되던 때였다. 따라서 지식과 교양을 담당하고, 문학을 하던 계층은 대개 성직자들이었으며, 문학 작품이 쓰여진 장소는 주로 수도원이었다.
하지만 10세기 무렵이 되면 세속권력을 쥔 강력한 황제나 군주들이 등장한다. 이런 세속 권력을 뒷받침하던 계급이 기사들이었다. 기사계급의 주된 업무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으로 그들은 단순한 병사들이 아니라 왕과 군주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고위 귀족들이었으며, 그들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해 내기 위해서는 기사계급 특유의 수행과 남다른 덕성의 함양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기사들은 자신의 군주를 위하여 싸울 때는 남다른 용감성을 발휘해야 하지만 자신이 목숨을 바쳐 싸운다는 것을 직선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주군의 부인을 위해 싸운다는 요식적 의레를 거친다. 이것은 기사들의 결투에서 승부와 생사의 결말은 언제나 하느님의 심판과 성모 마리아 은총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당대의 보편적 믿음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런 종교적 신앙이 기사들의 의식으로까지 발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중세에 들어와서는 문학의 주체와 장소가 더는 수도승과 수도원이 아니라 기사계급과 궁정으로 바뀌게 된다. 이들은 전투에 참여치 않을 때 궁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옛 게르만족의 가인과 비슷하게 자신들이 직접 지은 연애시나 서사시를 낭송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기사가 아니더라도 이런 낭송을 직업적으로 하고 대가를 받는 사람도 궁정에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중세 연애시인과 서사시인이 나타난다. 이처럼 기사계급이 주축이 된 문학을 '기사문학'이라 부른다.
특히, 1170년에서 1250년에 걸친 약 80년간은 - 정치적으로는 슈타우펜 왕조 시대였지만 - 중세 기사문학의 전성기였으며, 독일문학이 라틴어 문학 또는 프랑스문학의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중세고지독어로만 연애시나 서사시를 가창하게 된다. 더욱이 내용과 형식 면에서도 하나의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이룬 독일문학사상 첫 문학적 만개기였다.
출처
안삼환, 「한국 교양인을 위한 새 독일문학사」, <세창출판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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