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문학]

[독일문학사] 중세 독일문학

k2mbii 2021. 12. 2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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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배경

 카를 제국은 경건왕 루트비히에 와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843년, 그의 아들들은 제국을 서프랑켄, 중프랑켄 그리고 동프랑켄으로 삼등분해서 다스리게 된다. 870년과 880년의 조약에서는 중프랑켄이 다시 분할되어 기존 서프랑켄과 동프랑켄에 각각 통합됨으로써,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경계선이 정치적 국경선으로 되었다.

 한편, 9세기경 노르만족과 바이킹족이 북방으로부터, 그리고 헝가리족이 동방으로부터 유럽으로 침입한다. 하지만 카를 왕조의 황제들은 초기의 카를 대제 때처럼 이들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퇴치하지 못한다. 이에 게르만족 지역 군주들은 그들의 영토를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 결과 작센, 바이에른, 슈바벤 등 지역 군주들도 제법 강성한 국가 형태를 이루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동프랑켄의 카를 황제 가문의 대가 끊어지자 제국의 대공들이 모여 자신들 중의 한 사람, 즉 콘라트 1세를 왕으로 받든다. 나중에 콘라트 1세의 유언으로 프랑켄족과 작센족이 대타협을 이루어 919년에 작센게의 하인리이 1세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하인리히 1세는 933년 기마부대를 이끌고 운스트루트(Unstrut, 나움부르크(Naumburg) 근처를 흘러 잘레(Saale)강으로 합류하는 강 이름) 강변에서 헝가리군을 대파하엿다. 이어 그의 아들 오토 1세는 아헨에서 왕의 지위에 올라 955년 아우크스부르크 근교 레히 강변 평원에서 헝가리군을 완전히 격파한다. 그 결과 헝가리인들은 오늘날의 헝가리 땅으로 물러나 정착하게 된다.

오토 대제는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지원하도록 하는 대신에 그들에게도 세속적인 재산으로 봉토를 수여하였다. 그는 성직자들이 일반 대공들처럼 이기적 가문정치를 꾀하지 않고 유산으로 분배될 봉토에 대한 욕심까지는 갖지 않기 때문에 제국의 행정을 맡기기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962년 오토 대제는 로마에서 황제의 관을 받자 이때부터 독일의 왕은 황제를 겸하며 로마의 가톨릭교회를 보호할 책임을 지는 대가로 유럽에서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처럼 10세기 독일은 엘베강 동쪽에서 식민활동을 하기 시작하여 그 결과 폴란드인들도 기독교화되었다.

 

2. 황제와 교황의 갈등

 기독교의 전래 및 성공적인 토착화로 수도원들이 많이 증가하게 되자 독일에서는 수도승들과 수녀들이 고급문화의 전달자가 되었다. 수도원에서 라틴어로 연대기나 작품을 쓰는 일이 번성하였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나 수도원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다. 하지만 수도승들과 수녀들이 종교적 수행보다는 사역을 통한 수도원 부의 축적으로 세속적 타락의 길로 빠지는 일도 잦아졌다. 이에 클뤼니의 수도승들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엄격한 규칙을 다시 복원시키고 교계의 개혁을 주창하고 나섰다. 빠르게 파급된 이 개혁운동은 교황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11세기 후반에 이르자 이 개혁자들은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이 교황권에 종속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나선다.

 잘리에르 왕조의 제2대 국왕으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오른 하인리히 3세는 이런 클뤼니의 개혁운동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는 1046년에 3명의 교황을 퇴위시키고 독일인 주교를 새 교호아 클레멘스 2세로 세웠다.

 그 후 1073년 그레고르 7세가 교황에 오르자 당시 19세의 젊은 황제 하인리시 4세에게 '성직자 서임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에 대한 반발로 하인리히 4세와 독일의 주교들은 보름스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그레고르 7세에게 교황의 지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그레고르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의 신하들에게 충성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포하기에 이른다. 또한, 일부 대공들은 교황의 처사를 빌미로 새로 황제를 선출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다급해진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머무는 카노사 성으로 가서 사흘동안 참회하는 굴욕을 감내하고 마침내 파문 철회를 받아 낸다. 이것이 유명한 '카사노 행차'(1077)이다. 하지만 권력을 되찾은 하인리히 4세는 새로 선출된 황제를 격파하고 로마로 쳐들어가 다른 교황으로 교체한 다음 그로부터 황제의 관을 수여 받는다.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축출된 교황 그레고르 7세는 도주하여 남이탈리아에서 죽지만, 하인리히 4세와 교황들의 다툼이 끊이지 않자 독일 군주들은 하인리히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래서 하인리히 4세의 서거 후, 하인리히 5세는 1122년에 '보름스 화해조약'을 통해 교황과의 다툼을 종결시킨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주교들이 황제의 서임을 받는 대신, 황제나 그 대리인이 참석한 가운데 성직자들에 의해 선출되고 이어서 형식적인 서임을 받는다. 그리고 황제는 교황에게 위임받은 권한으로 고위 성직자를 상징하는 반지와 지팡이를 그들에게 수여한다. 황제의 신하로서 제국의 행정을 대행하던 주교들이 이제부터는 영방국가의 세속적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독자적 권력행사가 가능한 강력한 독립적 군주들로 변모된다. 예컨대, 후일 선제후가 되는 쾰른, 트리어, 마인츠의 대주교들을 보면, 성직자인 동시에 '영방국 군주'로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된다.

 

 

 

출처

안삼환, 「한국 교양인을 위한 새 독일문학사」, 『세창출판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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